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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저리 & Column

아부지

by 江山 2010. 1. 22.

 

 

 

                                                                     (왼쪽에 앉아있는 젊은시절의 내아버지)

 

 

 

아부지, 아버지, 아보지, 아범.

한글을 깨우쳤으니 2학년이나 3학년쯤 되었던 것 같다. 어느날 시험문제를 받아들었더니 4지선다형으로,

올바르게 표현된것을 묻는 문제였는데 40년이상이 지난일이지만 다른문제는 기억에없는데 이 문제만이

유독 아직도 아련히 뇌리에 남아있는 이유를 모르겠다.

물어보나마나 자신있게 "아부지"에 동골뱅이를 쳤던 기억이 생생하다. 표준말의 옳바른 표기법을 모른채,

늘상 불러오던 "아부지"가 정답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아버지라는 정답을 알고부터 괜시리 아버지만보면 미안한 마음이 든다.

아마,어머니를 묻는 똑같은 문제가 나왔더라도 "엄마"라고 자신있게 답했을것이다.

 

아부지.

아버지보다는 아부지가 훨씬 정감있고 부르기에도 좋은 것 같다. 그 아부지를 오랜만에 불러본다.

 

내게 기억되는 내 아부지는 글공부가 부족하여 무식하고, 때를모르고 몸이 부서지는줄도모르게 일을하는

미련한 곰이었고, 고집을 부렸다면 벽을 문이라고 우겨대는 고집불통이며, 술을 좋아해서 술만 취하면

집안을 벌집쑤셔놓은 듯 온 식구들을 못살게 굴었던, 그래서 좋은 인상을 남기지못한 기억이 많다.

아버지가 술에 취한 날이면 집안은 쥐죽은 듯 조용해야했고,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이웃으로, 자식들은

나름대로 피신을 해야 편한 생활을 했으니, 집안의 분위기는 늘 비상사태를 염두에 두고 살아했기에

마음편하게 살아야 할 가정이란 공간은 아니였다.

철없는 요구이지만 어느날은 조용히 어머니에게 이혼하고 자식들과 편하게 살자고 요구한적도 있었다.

친구들이 찾아오는것도 두려웠고 일가친척이 찾아오는것도 불안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른 후 지금, "아름다운 용서"라는 TV프로에서 보듯, 그런 상황에서도 뿔뿔이 흩어지지않고

문제없이 그런대로 잘 버텨준 가족들에게 지금은 고마운 마음이 든다. 

 

그놈의 술만아니면 말이없고, 잔소리없고,간섭하는 일이없어 好人중의 호인이요, 어떤일에 손을대면

깔끔하고 야무진 손재주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리만치 완벽의 극치를 보여주었던 좋은점도  있었다. 

 

그런 아부지가 지금으로부터 15년전, 홀연히 가족의 곁을 떠나고야 말았다. 우리 가족에게는 아부지에대한

인식이 그다지 좋지않았기에 당시에는 집안의 기둥이 무너졌다는 중요성을 빼고는 슬픔의 눈물이 나질않았

던것 같다.

이제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점점 더 하여 내가 그 아부지가 되어가는 길을 따라가고 있으니, 아부지의 기억

이 새록새록 더해옴은 어쩔수없는 아부지의 자식인 듯 하다.  

 

아이들을 나무랬습니다.

아이들은 반항하 듯 꼬박꼬박 대꾸질입니다. 오히려 아버지를 교육시키려합니다.

기가 막히고 환장할 일입니다.  열이 뻗쳐서 더욱 큰소리를 냅니다.

내가 더 큰소리를 지르니 그제서야 약간의 기가 죽습니다. 요즘 아이들은 말을 너무 듣지않습니다.

그릇된 일을 지적하고 잘 할 것을 요구해보지만 소 귀에 경읽기 입니다.

자연히 훈육의 목소리는 많아지고 높아지지만 아이들에게는 잔소리로만 여겨지나 봅니다.

난 예전의 내 아부지처럼 묵묵히 지켜보질 못하겠습니다.

 

내 아부지는 세상을 하직하는 날까지 끝끝내 말한마디없이 그렇게 묵묵히 지켜보고있었습니다.

인내심이 대단했던 것입니다.

이제야 당신의 뜻을 이해해 갑니다. 왜 술에 취해야 했는지, 왜 주정을 해야 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이 아들놈을 얼마나 답답한 심정으로 바라봤을까요.

아부지처럼 인내심을 길러봐야겠어요.

 

말없는가운데 강조했던 아부지의 철학을 잊지않고 있습니다.

자연적으로 흐르는 물길을 인위적으로 바꾸지말라는 정직함을 가르쳤습니다.

살아봐야 안다는 인생의 경험론을 가르쳤습니다.

 

그렇게 미워했던 아부지가 이제는 자꾸만 그리워 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