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네거리에 위치하여 현재는 농협중앙회건물이 자리잡고있으며 표석을 세워놓아 이곳이 역사의현장임을 알려준다.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5번출구)이다.
본관 순천(
順天).
자 국경(
國卿).
호 절재(節齋). 시호 충익(忠翼). 1405년(태종 5) 문과에 급제, 1419년(세종 1) 사간원 우정언(司諫院右正言)으로
등용
.
김종서는 1390년 고려말에 태어나 1453년 수양대군에 의해 비참하게 일생을 마친 조선初의
인물로서 文武 양면에서 이름을 크게 날렸던 걸물이었다.
1405년 15살때 文科에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거쳐 1433년 함길도 도관찰사가 되었고 이때
여진족의 침입을 격퇴하고 6鎭을 설치, 두만강을 국경선으로 확정함으로서 고구려멸망이후
700년넘게 만주족이 차지하고 있던 함경도땅을 이때 비로소 우리 땅으로 만들어 오늘까지
우리 민족의 영토로 지켜내려오고 있으니 김종서의 功은 아무리 칭송해도 모자랄 것 같다.
지혜와 용기를 두루 갖춘 훌륭한 신하로 '고려사' 의 개찬과 '세종실록', '고려사절요'의
편찬에 관여했으며 개인저서로는 '제승방략'과 시조 2수를 남겼다. 삭풍(朔風)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明月)은 눈속에 찬데 만리변성(萬里邊城)에 일장검 짚고 서서 긴파람 큰 한소리에 거칠 것이 없어라.
장백산에 기를 꽂고 두만강에 말 씻기니 썩은 저 선비야 우리 아니 대장부냐 어떠타 나라에 큰공을 누가
먼저 세우리오.
1453년,수양대군의 쿠테타는 나이어린 단종을 보살피도록 고명을 받은 대신 가운데 가장
지략이 뛰어나고 존경을 받았던 영의정 김종서의 제거로부터 시작된다. 가장 큰 장애가
김종서요 김종서만 제거하면 단종의 조정은 주춧돌없는 집이라는 판단에서였다.
그 제거에 수양대군이 손수 나섰다.
10월10일 밤 네 사람의 힘센 종을 거느리고 돈의문(서대문)밖을 나선 것은 밤이 깊었을
때였다. 만약의 일에 대비하여 권람으로 하여금 서대문 다락위에 복병을 숨겨놓고 있었다.
김종서대감의 집은 서대문밖 (지금의 농협중앙회건물자리)에 있었는데 김종서대감의
집에 이르니 대감의 아들인 김승규가 그의 친구들과 문전에 앉아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승규를 통하여 來訪을 알리자 김종서가 나와 안에 들기를 권했으나 수양대군은 해가 저물고
성문이 닫히기 전에 돌아가야한다하며 안으로 들기를 사양하였다.
그러면서 찾아온 사연을 말했다.
당시 왕후의 허물을 살피는 '종부시'에서 단종비 宋씨가 동래 온천에 가서 목욕한 일을 두고
그릇된 일이라 하여 탄핵이 올랐으니 이 사건을 잘 처리해 달라고 당부를 하면서 일부러
紗帽(갓대신 쓰는 작은 모자)를 떨어뜨렸다.
그러고서 수양대군은 어두워서 못찾겠으니 사모 하나를 빌려달라고 했고 김종서대감은
아들 승규로 하여금 사모 하나를 갖고 오라고 시켰다. 그 자리에 남아있던 김승규의 두 친구
에게도 '비밀 의논이 있으니 너희들은 그만 물러가라' 하였다.
이렇게 주변을 물리친 다음 수양은 청탁하는 편지가 있다고 건네주자 대감이 그것을 받아
달빛에 비춰보는데 수양대군이 데리고 온 종에게 눈짓을 하여 철퇴로 치게했다.
김종서가 땅바닥에 쓰러지자 사모를 들고 나오던 승규가 놀라 쓰러진 아버지 위에 엎드렸고
종들이 칼을 뽑아 김종서를 계속 찔렀다.
그길로 아랫놈을 시켜 宮으로 달려가 "김종서가 반역을 꾀하여 일이 급하므로 임금께 알리지
못한 채 죽였음을 아뢰나이다."고 고하게 했다.
그 다음 대신들을 모두 불러들여 미리 작성해둔 살생부(殺生簿)대로 모조리 철퇴로 쳐
죽임으로써 쿠테타를 성공시켰다.
그런데 죽은 줄 알았던 김종서는 죽지 않고 살아있음을 그때까지도 몰랐다.
되살아난 김종서대감은 사람을 시켜 가까운 돈의문 문지기에게 "정승이 밤새 남에게 맞아서
죽게 되었으니 빨리 임금에게 아뢰어 구제하도록 고하라"고 했으나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성문에는 수양대군의 하수인들이 복병을 하고 있었으니까....
오히려 김종서가 살아있음을 알린 결과가 되어버렸다.
김종서는 상처를 싸매고 夫人의 가마를 타고 성안에 들어가려했으나 돈의문(서대문)은
닫혀있었고 서소문, 남대문을 돌았으나 이미 한명회가 군사를 풀어 모든 門을 지키고 있어
성안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김종서가 죽지 않았다는 보고를 들은 수양대군은 새벽녘에 자객을 보내어 아들 승규의 방안에
숨어있는 김종서를 끌어내어 기어이 칼로 베어 죽여버렸다.
세종때 野人을 몰아내고 지금 함경도땅을 회복하여 국토를 넓힌 역사의 영웅이자 충신이었던
김종서의 최후는 이렇게 비참하게 끝났고 善보다 惡이 지배하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길었던
우리 역사에선 김종서같은 영웅은 대개 이렇게 불운하게 생을 마감했다.
남이장군. 임경업장군, 이순신장군, 박정희대통령처럼......
- 용미이돈님의 블로그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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