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1/30 목.
설연휴기간으로 입장료도 무료이겠다 역사공부를 핑계삼아 동구릉을 다시 한 번 방문한다.
방문자들이 많은것으로 보아 그래도 아직은 역사를 버리지 않았음을 증명하고 있다.
태-정-태-세-문-단-세-예-성-연/-중-인-명-선- 광-인-효-현-숙-경/-영-정-순-헌-철-고-순.
우리는 이렇게 역대왕들의 순서를 외우기도 했었다.
1392~1398년. 동9릉 건원릉
정안왕후외 14명의 비가 있다. 정안왕후와 개풍군의 후릉이다.
3대 태종 (1400~1418년). 이성계와 신의왕후의 5남으로 정종동생이다.
태종(현릉)은 원경왕후(서초구 내곡동 헌릉) 외 9명의 비가 있다.
4대 세종 (1418~1450년). 태종과 원경왕후 사이의 3남이다.
세종은 소헌왕후와 여주 영릉으로 합장릉이다.
현덕왕후와 경기 양주 합장묘인 현릉이다.
단종(영월 장릉)은 정순왕후(남양주 사릉)이다.
정희왕후와 광릉합장릉이며 차남이 8대 예종이다.
고양시 서오릉내 창릉으로 유난히 화재가 많았다고 한다.
정비 장순왕후(파주 봉일천 공릉)와 계비 안순왕후(고양 창릉) 외 후궁이 셋있다.
왕위에 오른다. (아버지 덕종과 어머니 소혜왕후의 차남이며 예종의 조카이다)
추존 덕종은 고양시 신도읍 용두리 경릉이다.
성종은 덕종의 차남이자 연산군과 중종의 아버지이다.
성종의 정부인 공혜왕후는 자식없이 죽고, 두번째 폐비윤씨가 연산군의 어머니,
셋째 계비인 정현왕후는 11대 중종의 어머니가 된다. 그외 후궁들이 20명은 될것이다.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삼성동 선릉) 과 정릉(11대 중종)을 선정릉이라 부른다.
수유리 연산군묘. → 회기동 경희대터 회릉을 옮겨감(1969).
→ 연화사에서는 매년 제를 올리고 있다.
중종 (삼성동 정릉)은 성종의 적차자로 1506년 형 연산군이 폐위되고 국왕으로 추대되었다.
1계비 장경왕후(경기고양 희릉)의 아들이 12대 인종이고, 2계비 문정왕후(노원구 태릉)의
아들이 13대 명종이다.
장경왕후는 인종을 낳고 6일만에 죽게 되어 세째부인 문정왕후 밑에서 자랐다.
인종은 인성왕후(고양시 효릉 합장릉) 와 후궁4명을 두었으나 소생으 두지 못했다.
8개월의 재위기간으로 가장 짧은 효자였다.
이복형인 인종이 즉위 8개월만에 승하하자 왕위에 올랐다. 문정왕후가 수렴청정하였다.
명종은 인순왕후(공릉동의 강릉 쌍릉)와의 사이에 아들(순회세자)이 12세에 요절한다.
조선 건국(1392) 이래 160여 년 동안 이어져온 태조 이성계의 마지막 '직계 적통'이다
그리하여 아버지중종과 후궁 창빈안씨와의(즉 서자)였던
덕흥군의 셋째아들 하성군(14대선조)에게 보위를 물려주게 된다.
정비인 의인왕후가 후사를 잇지못하자 인목왕후와 셋째 공빈김씨를 비롯한 8명의 후궁을
두었다. 이 중 셋째부인 공빈김씨가 낳은 둘째아들이 15대 광해군이고, 넷째 인빈김씨가
낳은 아들(정원군+인헌왕후)의 아들, 즉 손자가 16대 인조이다.
동구릉의 목릉으로 의인왕후와 인목왕후(선조와 32년 나이차)가 함께 있다.
인목왕후에겐 광해군을 세자로 정한뒤 늦게 영창대군을 낳았으나 심각한 세자책봉문제로
영창은 8살의 어린나이에 죽고 말았다.
영창대군을 강화도로 유배후 사사하고 인목왕후를 폐위한다.
개혁정책과 강압적인 정치방식에 불만을 품은 서인세력이 구테타를 일으켜 폐위한다.
조세개혁 대동법실시.
남양주 진건읍 광해군묘. 공빈 김씨의 무덤 오른쪽에 임해군이 묻혀 있고 그 아래에
광해군이 묻혀 있지만, 임해군의 양손들은 공빈 김씨와 임해군에게만 시제를 올리고
광해군의 무덤에는 발길도 안 돌렸다고 한다.
장남(능양군)이다. 즉 선조의 손자이며 광해군조카이다.
정비 인열왕후가 4남용성대군을 낳다가 사망하였고 계비로 장렬왕후가 간택되었는데
아들인 효종보다도 5살이나 적었다.
파주시 탄현면 장릉(長陵)으로 인열왕후와 합장릉이다.
아버지인 정원군(선조의3남) 능도 장릉(章陵)인데 경기도 김포시 풍무동에 있다.
정비인 인선왕후 사이에 18대 현종이 있고 3명의 후궁이 있다.
병자호란 때 형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볼모(인질)로 잡혀 끌려갔었다.
구리 동구릉에 있었으나 경기도 여주시 세종대왕면(구 능서면)에 있는 영릉(寧陵)
으로 인선왕후와 대각선앞뒤로 배치해 있다.
세종대왕이 묻힌 영릉(英陵)과 가까운 위치에 있다.
효종의 묫자리 물망지 수원은 정조와 사도세자의 융건릉이 되고, 파묘자리인
동구릉의 원릉(영조)이 되었다.
명성왕후와 나란히 묻힌 동9릉의 숭릉이다.
아버지 현종이 일찍 승하하자 12세의 나이에 즉위하였다.
정비 인경왕후, 1계비 인현왕후, 2계비 인원왕후, 후궁 희빈장씨(-20대경종),
후궁 화경숙빈최씨(-21대영조) 외 4명.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 내에 있는 명릉(明陵). 숙종과 2번째 왕비 인현왕후 민씨가
나란히 묻혀 있는 쌍릉과 3번째 왕비 인원왕후 김씨가 혼자 묻힌 능 1기가 오른쪽
위 언덕에 따로 떨어져 있다.
서오릉 내에 있는 익릉(翼陵)은 첫번째 왕비인 인경왕후 김씨의 능은 명릉 내에
있지 않고 아예 따로 조성되었다.
숙종의 명릉은 서오릉의 능역 중에서 유일하게 능침앞까지 올라갈 수 있는 능이다.
4년을 재위하다가 37살에 병으로 죽었다.
1724년 경종이 죽고 난 이후, 양주 중랑포 천장산 자락에 묻혔고(현재 석관동)
뒤이어 선의왕후 어씨가 1730년 세상을 떠나 그 앞에 의릉을 조성했다.
경종의 정비 단의왕후는 일찍 죽어 동구릉의 혜릉이다.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경종의 이복동생이다. 세제로 왕위에 올랐다.
재위기간 52년으로 조선최장수 군주이며 63년을 살았다.
정비 정성왕후. 계비 정순왕후. 후궁1(온희정빈 이씨)에서 효장세자를 얻고,
후궁2 (소유영빈 이씨) 에서 2남 장헌세자(사도세자)를 얻었다.
영조66세에 15세의 나이로 두번째 왕비가 된 정순왕후와 동구릉의 원릉이다.
정순왕후는 23대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대왕대비로 수렴청정하였다.
정비 정성왕후는 홍릉(弘陵)으로 고양시 덕양구의 서오릉에 있다.
23세로 왕위에 올라 24년간 재위하고 47세에 죽었다.
배봉산에 수은묘에서 영우원으로, 다시 수원 화산으로 옮기고 현륭원
정조는 즉위와 동시에 자신이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선언했다. 아울러 장헌세자라는
존호를 올리고 수은묘의 이름을 영우원(永祐園)으로 수은묘는 경모궁(景慕宮)으로
올렸다. 아버지의 죽음에 늘 애통해하던 정조는 훗날 양주군 배봉산의 영우원을
수원의 화산으로 옮긴 뒤 현륭원(顯隆園)이라 하고 국왕의 능묘에 버금가는 규모로
지었다.
융건릉 : 융릉(사도세자와 현경왕후(혜경궁)). 건릉(정조와 효의왕후)
정조는 정비 효의선황후 외 4명의 후궁이 있고 그중 후궁 의빈성씨에서 첫째인
이복형 문효세자가 있었으나 일찍 죽었다.
순조는 당대 최연소인 11살나이에 즉위했다.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했다.
순조의 능은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에 있는 합장릉인 인릉(仁陵)으로 근처에
16대조 할아버지인 태종과 원경왕후의 능인 헌릉(獻陵)이 있어서 헌인릉(獻仁陵)
이라고 한다.
처음에 순조는 죽은 후 파주 지역에 묻혔지만 25대 철종 때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고
천장 이듬해 순원왕후가 죽자 합장되어 현재 인릉을 가보면 합장릉의 형식을 띄고 있다.
장소가 장소인지라 능침이나 정자각 등은 찍어도 상관없는데 인릉에서 함부로 사진을
촬영하면 제지받는다.
즉 순조의 손자이다. 부왕인 효명세자(문조)가 20세에 요절하여 왕이 되었다.
동구릉의 경릉으로 왕비인 효현왕후, 효정왕후와 나란히 묻힌 삼연릉(三連陵).
문조로 추존된 아버지 효명세자도 동구릉의 수릉이다.
철종은 고조부(영조) - 사도세자(증조부) + 정비 혜경궁홍씨 2남 정조(조부).
+ 후궁 숙빈임씨와의 3남 은언군(조부).
은언군(정조의 이복동생)의 서6남인 전계대원군의 아들이다.
희릉은 중종(11대)의 비 장경왕후의 묘.
예릉은 철종과 철인왕후 김씨의 쌍릉이다.
예릉은 조선 왕조의 상설 제도를 따른 마지막 능이다.
철종 다음의 고종과 순종은 황제였으므로 왕릉의 법식이 아니라 황제 능의 법식을
따랐기 때문이다.
26대 고종 (1864 ~ 1895년) 조선의 마지막 국왕이며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이다.
부왕은 흥선대원군이다.
흥선대원군은 사도세자의 양증손이자, 정조의 이복동생 은신군의 양손자이다.
왕비 명성왕후 사이에 2남이 27대 순종이고, 후궁 귀인장씨 사이에 의친왕,
후궁 엄씨 사이에 영친왕이 있다.
27대 순종 (1895 ~1897년) 고종과 명성황후 민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순명효황후 민씨 사이에 자녀가 없어 조선왕실은 단절되었다.
남양주 금곡의 홍유릉
여기 동구릉은 동쪽에 있는 아홉기의 능으로 7명의 왕과 10명의 왕비가 잠든 곳이다.
건원릉 : 1대 태조
현릉 : 5대 문종과 현덕왕후,
목릉 : 14대 선조와 의인왕후, 인목왕후,
숭릉 : 18대 현종과 명성왕후.
원릉 : 21대 영조와 정순왕후.
경릉 : 24대 헌종과 효현황후, 효정황후.
수릉 : 추존 문조(23대순조의 아들)와 신정황후.
휘릉 : 16대 인조의 두번째 왕비 장렬왕후.
혜릉 : 20대 경종의 첫째왕비 단의왕후.
▼수릉(문조와 신정황후의 능)
문조는 23대 순조의 아들로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나 22세로 세상을 떠났다.
아들 헌종이 즉위한 후 익종으로 추존, 대한제국 선포 후 문조로 바꾸었다.
▼현릉(5대 문종과 현덕왕후)
문종은 세종과 소현왕후의 아들이며 왕세자빈이던 현덕왕후는 단종을 낳고 곧바로 세상을 떠났다.
문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후로 추존되었다.
▼목릉(14대 선조와 의인왕후, 안목왕후)
선조는 중종의 손자이자 덕흥대원군의 아들이다.
1567~1608년의 재위기간동안 두차례 일본의 침략(임진왜란. 정유재란)으로 혼란을 겪음.
이때 이이와 이황 등 유학자들이 배출되기도 했다.
의인왕후는 자식이 없었으며 인목왕후 김씨를 두번째 왕비로 책봉하였다.
목릉은 현재의 경릉(헌종)자리에 있었으나 의인왕후의 능이 있는 현재 목릉자리로 옮겼다.
▼정자각 좌측 선조와 우측 의인왕후의 능
▼인목왕후의 능
▼기둥의 양식때문에 보물로 지정 된 목릉의 정자각.
▼건원릉(태조의 능)
(재위기간1392~1398년) 고려말 뛰어난 장군으로 1392년 신진사대부의 추대로
한양을 수도로 조선왕조를 세웠다.
유언에 따라 고향인 함흥의 억새로 봉분을 조성하였다.
▼휘릉(16대 인조의 둘째왕비 장렬왕후 능)
▼원릉(21대 영조와 두번째 왕비 정순왕후 능)
영조는 19대 숙종과 숙빈최씨의 아들로 20대 경종이 세상을 떠나자 왕위에 올랐다.
정순왕후는 영조66세에 15세의 나이로 두번째 왕비가 되었다. 23대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대왕대비로 수렴청정하였다.
원래 영조는 첫번째 왕비 정성왕후(홍릉)곁에 묻히고자 했으나 뒤를 이은 영조가
현재의 자리에 능을 조성하였다.
탕평책(붕당정치 해소). 균역법(세금제도 개편).
▼원릉에서 경릉으로 가는 왕의 길.
▼경릉(24대 헌종과 첫째 효현황후. 둘째 효정황후의 능)
헌종은 추존 된 문조와 신정황후의 아들로 8세로 왕위에 올랐다.
효현황후는 헌종3년 16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효정황후는 헌종10년 왕비로 책봉되었다.
세개의 봉분이 나란히 놓인 형식은 조선왕릉 중 유일하다.
▼나무의 버팀지지 고정방식.
▼경릉에서 혜릉 왕의 길 구간.
▼혜릉(20대 경종의 왕비 단의왕후 능)
19대 숙종22년에 왕세자빈이 되었으나 경종이 즉위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혜릉과 숭릉간 왕의 길 구간.
▼숭릉(18대 현종과 명성왕후의 능)
현종은 효종과 인선왕후의 아들로 청나라 심양에서 태어났다.
대동법 실시.
명성왕후는 효종2년에 왕세자빈이 되었고 현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목릉의 정자각과 숭릉정자각의 팔작지붕은 보물로 정해졌다.
▼숭릉과 연지구간은 숲을 연구하던 예전생각이 남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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