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 확대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일제는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킨다.
이듬해 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게 되자 일본은 한국을 속국으로 삼겠다는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정부의 거의 모든 부문에 고문(顧問)을 파견해 간섭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른바 고문정치를 통해 실권을 장악하게 된 일본은 한국을 경제적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차관을 제공한다. 이 돈은 반발하는 한국인을 억압하기 위해 경찰조직을 강화하고 일본 거류민 시설을 짓는 데 사용하게 된다.
이로 인해 외채는 눈덩이처럼 불어나 1907년에는 당시 대한제국의 한 해 예산과 맞먹는 1300만원에 달했다.
막대한 대일 차관으로 한국 경제가 파탄에 직면하게 되자 같은 해 2월21일 대구에서 서상돈, 김광제 선생을 비롯해 뜻있는 지역 유지들이 의연금을 모아 일본에 진 빚을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에 나섰다.
이 운동은 국권을 빼앗긴 백성들의 마음을 움직여 곧바로 전국으로 확산됐다. 남자들은 담배를 끊고 여자들은 패물을 기증했다. 전국 각지의 기생들도 금가락지나 은가락지를 내놓았다. 고종황제 역시 대신들과 단연운동에 참여했고 일본과 미주, 러시아 동포들도 돈을 보내왔다.
이 운동은 5월까지 4만여명이 참여하고 보상금액도 230여만원에 달해 구한말 최대 민족운동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말 이 운동을 주도한 대한매일신보에 대한 일제의 집요한 탄압으로 크게 위축돼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일제로부터 국권을 회복하고 경제적 독립을 지키기 위해 전개됐던 국채보상운동이 21일로 100주년을 맞았다. 비록 일제의 방해 공작으로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나라가 어려울 때일수록 힘을 모아 위기를 극복하는 우리 민족의 저력을 유감없이 보여준 국민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당시 ‘금 모으기 운동’으로 국민이 하나 될 수 있는 정신적 바탕이 되기도 했다. 국채보상운동 발원지인 대구에서는 이 운동의 교훈과 의미를 되새기는 각종 기념행사가 열리고 있다. 이리저리 갈린 국민의 마음을 다시 한번 하나 되게 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안경업 논설위원 |
2007.02.21 (수) 18: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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