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좌포청 터로 말하면 퍽 광활하여 지금 단성사까지도 그 구내로 들었다.
요즘 모든 남녀가 동행을 해서 단성사 일등석에서 활동사진이나 연극 구경을
하면 가장 호화스러운 듯하지만 실상을 알고 보면 `보두청(포도청)`에 들어가
앉은 셈이다." (`별건곤` 1929년 10월호)
1915년 일제는 식민통치 효과를 선전하기 위해 조선물산공진회를 열면서 경
복궁 주요 건물을 뜯었다. 그 이후로 총독부 등 식민통치를 위한 근대식 건물
이 들어서면서 조선시대 서울 모습은 급격하게 사라지기 시작한다. 하루가
멀다하고 새 건물이 생기고 또 들어섰다. 요즘 서울 변화상을 두고 `상전벽해
(桑田碧海ㆍ뽕나무 밭이 푸른 바다로 변한다는 뜻)`라고들 하지만 그때도 지
금보다 덜하진 않았다.
본래 모습을 급격하게 잃어가는 서울에 대한 기록을 담당한 것은 언론이었다.
개벽` `별건곤` `조광` 등 잡지와 각종 일간지엔 서울 특집기사가 자주 실렸다.
일제 억압에 맞서 우리 것을 지킨다는 의미도 있었기에 더 열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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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서울 / 강명관 지음 / 푸른역사 펴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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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자료를 보면 식민지 시대 서울 모습을
생
생하게 느낄 수 있다. 고궁과 성곽 등 왕조시
대 유산과 사라진 옛 건물, 시전 쇠퇴로 상징
되는 도심 상권 변화 등도 엿보인다. `서울의
옛날 집과 지금 집` `서울 동명에 숨은 이야기`
등 서울 각 마을 유래와 역사를 살핀 글도 여
럿 있다. 재미도 쏠쏠하다. 독자들이 직접 나
서 서울 명물을 소개하는 `경성백승`엔 각 동
네에 얽힌 흥미로운 일화들이 재치 있게 소개
되어 있다.
"원동(종로구 원서동)은 `모기`가 명물입니다.
원동 모기는 한 동리 명물 노릇을 하는 까닭인
지 여간 주제넘지 아니하여 지체를 대단히 본
답니다. 그래서 계동 모기와는 혼인도 아니 한
답니다."
"명물 명물 하니 이촌동 수해처럼 유명하고 지
긋지긋한 명물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촌동! 하면 세상 사람은 벌써 장마 때
수해 나는 곳인 줄을 연상합니다. 말씀 마십시오. 해마다 수해라면 지긋지긋
합니다."
당시 풍속사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들도 있다. 가령 `경성어록` 저자는
"서울 욕이 지방 욕보다 더 심하다"며 갖가지 욕설을 소개한다. 그는 "깍정이
(걸인) 놈, 보두청에 갈 놈, 염병을 할 놈 등을 종합하면 전염병에 걸리고 죄
인이나 걸인이 되라는 얘기"라고 말한다. `경성 명물집` `경성의 화류계` `풍
속의 고금`에선 서울 기생과 기방 풍습, 기생제도 붕괴 이후 출현한 권번, 설
렁탕이나 선술집 같은 음식문화 등도 볼 수 있다.
100년 전 서울 거주민들이 변화에 대해 느낀 감정은 현재 거주민들과 별반 다
를 게 없었다. 빠른 변화에 무기력증과 두려움을 느끼다가도, 풍속과 경관을
저해하는 것으로 간주된 졸부집단의 속물주의에 대해선 날선 비판을 날린다.
"조그마한 경성에 간 곳마다 유흥의 낙천지는 열렸다. …돈푼이나 달랑거리는
철없는 부랑의 아들아, 속절없이 기생과 자동차에 서울의 풍경을 어지럽게 말
아라."(개벽)
"단벽층루의 광화문을 비롯하여 고승유적이 바야흐로 폐허를 이루어 이르는
곳마다 신면목의 현대적 누각이 족출하는 한편으로 구문화의 면목은 날로 달
로 그 영적을 감추게 되니."(경성백승)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가 펴낸 `사라진 서울`은 식민지 시대 간행물에
실린 글들을 통해 격동기를 통과하던 당시 서울과 서울 사람들을 재현한 책
이다.
대학원에 다닐 때 `자각(紫閣)`이란 단어가 서울 남산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해 충격을 받았다는 그는 20년 이상 서울에 관한 자료를 꼼꼼하게 모은 끝
에 이 책을 내놓게 됐다.
강 교수는 "사람이란 제가 익숙한 것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법이다.
1910년 이후 서울에 대한 기록이 남게 된 것도 그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변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라며 "서울의 과거에 관심 있는 분들에게 조금 참고
가 된다면 바랄 나위가 없겠다"고 말했다. (매경 1/16일자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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