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의 고향

잉카제국 왜 허망하게 무너졌나?

by 江山 2010. 1. 9.

 

  (북월드) 잉카 최후의 날.

     킴 매쿼리 지음/ 최유나 옮김/ 32,000원

 

작가이며 인류학자 다큐제작자인 짐 매쿼리가 페루에 5년이상 머물며 집필한 잉카 최후의 날은 잉카멸망사를 승자의

눈이 아닌 잉카와 스페인 양측의 시각에서 동등하게 바라보며 새롭게 재 조명한 역작이다.

잉카를  정복한 스페인들은 중요한 문서를 스페인어로 작성하면서 역사를 철저히 왜곡시켰다.

아마존강 유역에서 잉카제국을 기억하고 있는 요라(yora)라는 부족을 찾아내면서 새로운 사료를 접하게 된 저자는

수많은 역사적 사실들을 비교 분류해 가장 진실한 이야기를 담아냈다.

 

스페인 사람들이 잉카로 간 끼닭은 순전히 황금 때문이다.

잉카의 불운은 그들이 갖고있던 황금과 은이 우연히도 16세기 유럽의 통화단위와 똑같았다는 데 있었다.

당시 선원들의 1년 평균 임금은 금 1/2파운드였다. 바다에서 20년동안 뼈빠지게 고생하면 금 10파운드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신세계정복 전쟁인 카하마르카 전투에 참여했던 기병이 금 90파운드와 은 180파운드를 하사받았다.

일반 선원의 180년치 봉급이었다.

그들에게 정복이란 모험의 문제가 아니라 일확천금을 벌 수있는 인생역전의 대박사업이었다.

사람을 살해하고, 재물을 약탈하고, 문명을 파괴하는 그들은 무기를 손에 든 기업가였다.

 

구두수선공, 재단사, 선원, 대장장이, 목수, 상인 등 당시 스페인의 낮은 신분계층에 속했던 사람들에게

잉카원정은 로또나 다름없었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프란시스코 피사로(1478~1541)다.

기마대 대위였던 아버지와 정식으로 결혼하지않은 하녀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피사로는 장남이었지만

공식적인 교육을 받지 못했으며 아버지의 소유지도 물려받지 못했다.

출생의 상처와 아버지 집에서 살고 싶었던 무의식적 욕망은 그의 발걸음을 필연적으로 신대륙으로 향하게 했다.

탐험가로부터 잉카제국 이야기를 들은 피사로는 1532년 11월 15일 168명을 이끌고 카하마르카에 도착했다.

다음날 피사로는 대군을 배후에 남겨둔 채 5000만명을 데리고 피사로와의 회견을 위해 찾아온 아타우알파 황제를

포로로 잡은 채 그의 군대를 전멸시켰다.

스페인군은 한 명의 사망자도 없었고 30분만에 끝났으니 싸움이라고 하기보다는 대량 학살이었다.

이타우알파한테 몸값으로 방 한가득 황금을 받은 피사로는 황금만 챙긴 뒤 2~3개월 뒤에 그를 처형햇다.

이듬해 11월 피사로는 한 번의 대접전도없이 잉카의 수도 쿠스코에 무혈입성했다.

피사로는 망코 잉카를 황제로 추대했으나 3년 후 망코 잉카는 도주하여 빌카밤바에 새 수도를 건설한 뒤 스페인군에

대항 할 반란군을 결성했다.

반란군은 한때 20만명까지 늘어나 스페인군을 포위하는 등 선전했으나 그 다음해에 진압당했다.

망코 잉카가 암살당한 후 그의 후손은 끊임없이 게릴라전을 펼쳤지만 마지막 황제 투팍 아마루가 세상을 떠나면서

잉카는 1572년 영원히 멸망하고 만다. 그 사이 정복군은 내부 분열을 겪는다.

피사로의 협력자 알마 그로가 자기 몫의 전리품을 요구하며 반란을 일으켰다가 처형 된 것.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피사로도 1541년 알마그로를 지지하는 무리에 의해 살해됐다.

 

저자는 장장 4000Km가 넘는 대륙에 1000만명이 넘는 인구를 가졌던 잉카가 허무하게 몰락한 이유를 네가지

부재때문으로 설명한다.

첫째, 남미에는 불행히도 소와 말같은 유럽에는 흔한 가축이 없었다는 점이다.

        오랫동안 가축과 생활해온 유럽인들은 동물성 전염병에 대한 면역력이 있었으나 신대륙 사람들은 그게 없이

        유럽인들이 들여온 새로운 병에 걸려 목숨을 잃었다는 것.

둘째, 강철과 총의 부재다.

        잉카에는 금광과 은광만 넘쳤을 뿐 무기로 쓸 철을 캐낼 만한 철광이 드물었다. 잉카 전사들이 아무리 용맹해도

        구석기 수준의 무기만으로 총칼로 무장한 유럽인들의 화기를 막아내기는 역부족이었다.

셋째, 잉카인들에게는 문자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키푸라는 밧줄과 끈의 매듭으로 소규모 정보를 기록하는 게 전부였다. 따라서 잉카인들은 스페인의

        멕시코 카브리해 연안점령 등 국경선 너머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아는게 거의 없었다. 정보량 부족과

        소통 부재는 우물안 개구리 신세와 같았다.

넷째, 중앙집권 체제가 채 갖춰지지않았고 갑작스레 대제국을 건설한 잉카족의 폭정에 시달리며 조공을 바치던 수

많은 부족들이 스페인 군대에 협력, 반잉카의 선봉에 선 점이다. 

 

 

 마추 픽추(machu picchu)는 페루에 있는 잉카 문명의 고대 도시이다. '마추픽추'는 현지어로는 '늙은 봉우리'를

의미한다.

페루 우루밤바(Urubamba) 계곡에 연한 높은 산의 산턱(해발 약 2,057 m)에 위치하여, 산자락에서는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없다.

종종 '잉카의 잃어버린 도시', '공중의 누각'으로 불린다. 그 유적은 3 m씩 오르는 계단식 밭이 40단이 있어서,

3,000개의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다. 유적의 면적은 약 13 k㎡로, 돌로 지어진 건물의 총 갯수는 약 200호 정도 된다.

마추 픽추에는 밝혀지지 않은 수수께끼가 아직 많고, 열대 산악림대의 중앙에 위치하여 식물의 다양성이 풍부하다.

행정상으로는 쿠스코와 같은 지역에 속해 있다. 현재 페루에는 10개소의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있는데, 마추 픽추는

그 중 최초로 쿠스코와 동시(1983년)에 지정되었다.

 

 

 (옮겨온 사진)

 

 

 

 

 

 

 

 

 

 

 

 

 

 

 

 

 

'역사의 고향' 카테고리의 다른 글

6.25사진전  (0) 2010.04.15
단성사  (0) 2010.01.17
경희궁  (0) 2009.09.02
동대문  (0) 2009.09.02
종각  (0) 2009.09.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