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2. 24 수 맑음
단지내 매화꽃이 피었다.
5D Mark2
매화! 하고 부르면 봄날의 향기가 난다.
매화! 하고 한번 더 부르면
추워 웅크린 겨울도 저만큼 어느새 따스한 봄날이다.
저 여린 꽃잎 떨어지면 몽글한 열매 열린다니
반갑고 소중한 인연이다.
= 시인 안시안 =
梅一生寒不賣香 (매화는 일생을 춥게 살지만 향기를 팔지 않는다)
신흠(조선중기의 대문장가 한시의 한 대목으로) 선비가 지녀야 할 마음과 몸가짐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시.
매화는 눈을 뒤집어 쓰더라도 자신의 열기로 녹이고 꽃을 피워 설중매라 하고
고난에도 굴하지 않는 선비의 기상과 절개를 보여주고 있다.
향기는 미미하지만 멀리까지 간다.
퇴계가 단양군수로 부임했을 때 그의 학식과 덕망을 흠모했던 두향(杜香)이라는 관기가 있었다.
두향 역시 거문고와 시에 능한 콧대높은 기생이었으며 퇴계도 무척 총애했다.
2년여의 재임기간 동안 두향은 수차례 러브콜을 보내 왔지만 퇴계는 흔들림없이 한번도 마음을
열지 않았다.
그에게는 먼저보낸 부인 권씨에 대한 아픈상처가 있기 때문이었다.
부인 권씨는 친정아버지(권질)와 가문의 몰락으로 인한 충격으로 인해 정신적 장애가 있었다.
그런 부인이었지만 온갖 허물을 덮어주며 아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출산중에 그만 세상을 뜨고 말았다.
사실 그에게는 일찍 사별한 첫부인에 이어 두번째의 상처로 인한 아픔이었다.
그랬던 퇴계가 단양을 떠나게 되자 두향이 이별의 정표로 매화나무 한 그루를 선물로 가져왔다.
돌아가신 어머님이 애지중지하던 나무라는 말을 듣고 그제서야 퇴계는 마음을 열고 받아서
고향집마당에 심었다.
그 후로 두 사람이 한번도 만난적은 없지만 서신으로만 서로의 마음 즉, 늦게 핀 매화의 참뜻을
확인했다.
이윽고 퇴계가 타계하자 두향은 초막을 짓고 삼년시묘를 했다고 전해진다.
이룰 수 없는 사랑과 매화스토리다.- 단양 두매공원.
700D
3월 8일(월) 700D
<매화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는 단원 김홍도의 이야기>
단원은 평생 끼니걱정을 할 정도로 궁핍하게 살았다.
하루는 나무장수가 찾아와서 멋진 매화분재를 사라고 권하였는데
때마침 단원에게는 청탁받은 그림값 3천냥이 수중에 있었다.
그 중 2천냥을 나무값으로 지불하고 8백냥은 지인들을 불러 매화집들이 술파티를 벌이고,
남은 2백냥으로 양식을 샀는데 달랑 하루치 끼니꺼리였다고 한다.
타고난 천재였던 단원은 그의 호방한 기질만큼이나 굴곡있는 생을 살면서 많은 걸작을 남겼다.
21/2/26(금) 오늘은 어린이대공월엘 갔더니 뜻밖에 홍매화가 개화를 했다.
카메라밧데리가 바닥나서 핸펀으로 담았다.
조선 최고의 학자로 손꼽히는 퇴계 이황은 학문적 소양뿐만 아니라 소문난 애처가이기도 했다.
조선 중기 성리학의 대가로 불리는 만큼 스스로 실제 일상에서도 뛰어난 인품으로 그를 따라는
제자들이 줄을 이었다.
그러나 퇴계 이황의 개인적인 삶을 들여다보면 기구한 면이 많다.
특히 그는 부인을 두 차례나 먼저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었다.
21세에 동갑내기 허씨 부인과 첫 번째 결혼을 하지만, 부인이 두 아들을 남겨두고 27세에 세상을
뜨고 만다.
이에 퇴계는 삼년상을 치른 뒤 30살에 권 씨 부인을 두 번째 부인으로 맞이했다.
정신질환을 심하게 앓고 있던 권씨부인과의 결혼 배경에는 역사적 비화가 숨어있다.
권씨 부인의 할아버지 권주는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전달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결국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할아버지는 갑자사화의 피해자로 교살당하고 만다.
권씨부인의 할머니는 관비가 되었고 아버지 역시 유배당하면서 그야말로 온 집안이 풍비박산
나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어렸던 권씨는 정신질환을 얻게 되었고, 아버지 권질은 유배 가는 길에 "부디 죄인
의 소원을 들어주시게나"라며 딸을 부탁했다.
퇴계는 권씨 부인의 아버지 부탁에 그를 아내로 받아들이면서 평생 그녀를 보호하고 품어주었
다. 정신질환과 갑자사화 배경을 짊어진 집안의 딸이었기에 아내의 존재는 퇴계의 벼슬길에
번번이 지장을 주었지만, 그는 결코 부인을 내치지 않았다.
오히려 부인이 특이 행동을 보일 때마다 사태를 수습하려 사방을 뛰어다니며 아내를 보호해
주었다.
일례로 조부의 제사상을 차리는 와중 상 위에서 배가 하나 떨어지자, 권씨 부인은 재빨리 배를
집어 치마 속에 숨기는 행태를 보였다.
이를 본 큰 형수는 동서를 나무랐지만 퇴계 이황은 이를 말리며 "죄송합니다. 앞으로 제가 잘
가르치겠습니다. 다만 손자며느리의 잘못이기는 하지만 돌아가신 조부께서도 귀엽게 보시고
화를 내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고개를 숙였다.
제사를 마친 뒤 이황은 부인에게 왜 치마 속에 배를 숨겼냐고 물었고, 이에 부인이 "배가 먹고
싶어서 숨겼다" 라고 하자 퇴계는 오히려 손수 껍질을 깎아 배를 잘라 줬다.
또한 첫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들에게도 친어머니에게 하는 만큼의 예우를 권씨에게
보일 것을 가르쳤다.
다만 권씨 역시 46세의 나이에 아이를 낳다가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이황은 이에 매우 슬퍼하면서 아들들과 함께 3년간 권씨부인의 묘에서 시묘살이를 했으며,
부인의 묘 근처에 암자를 짓고 기거했다고 알려졌다.
이외에도 퇴계 이황은 학문과 예의에 있어서 엄격했지만 성(性)이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항상
유연하고 합리적인 태도를 보여왔다.
자신의 둘째 아들이 일찍 유명을 달리하는 바람에 며느리가 젊은 나이에 청상과부가 되자,
이황은 사돈댁에 재가를 허락하는 편지를 보낸 일화도 있다.
당시 조선 풍토를 생각해 보면 이러한 이황의 행보는 매우 파격적이라고 볼 수 있다.
2025/4/8. 봉화산공원.
청매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