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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저리 & Column

중국방문을 마치고.

by 江山 2012. 1. 19.

 

1987년 6월의 무더운 여름날,

우리는 중국을 방문하기 위한 여정에 오른다.

우리나라보다 저 아래쪽 30도 선상에 위치한 상해는 정말 한 여름이었다.

설레임과 두려움으로 외국여행길에 처음 나서는 나에겐 첫선을 보는 처녀총각의 그런 마음으로 갈아입어야

옷가지와 즉석라면, 통조림, 밑반찬까지 가방 끈이 고통을 받을 만큼 커다랗게 짐을꾸려 떠났다.

(음식물은 그곳 유학생들에게 주고 왔지만)

10일간의 긴 일정 속에 동떨어진 세계에서의 나 살기위한 생존전략? 일지도 모른다.

 

지리적으로 역사적으로 가까운 나라 중국.

개방화물결이 한창 일렁이는 정도로만 알고 떠나는 공산권 대륙으로의 여행.

우선 시각적으로 공산권의 냄새가 풍기지 않는다는 것에 나의 상상을 초월했다.

 

 때마침 홍콩반환의 시점에서만난 상하이의 황포공원, 홍콩반환 상징의 조형탑에서 발하는 조명불빛은

황포강물에 어지러이 빛나고 실제 우리사회에서도 보기 힘든 모습의 연인들의 진한 사랑의 몸짓. 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의 행렬. 카셋트 테이프에 몸을 던진 여유있는 춤솜씨. 이 모든 것들이 생각했던 공산권

그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에서 나의 짧은 생각은 여지없이 빗나가고 말았다.

 

거대하게 버티고 있는 황포대교와 남포대교. 엄청난 위용으로 자리하고 있는 다리는 3층 구조의 원형으

만들어져 포동지구의 미래를 대기하는 듯 했다. 21세기로 이어지는 그런 다리였다.

중국의 거점도시로 한층 성장할 넓은 대지가 개발의 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또한 1900년대 우리 독립운동의 중심지가 아니런가

조국의 독립을 위해 피흘려야했던 독립투사들, 임시정부청사의 모습을 보며, 당시의 어려움 그 정신을

되새겨볼 기회의 시간들이었다.

그곳엔 북한측 상점도 있었다. 한민족이면서 대화가 단절된 또 다른나라 북한. 점원들에게 말을 붙여보고

싶었지만, 말조심해야한다는 현지 가이드의 말에 그냥 발길을 돌려야 했다.

또한 홍구공원엔 덩그마니 남아있는 윤봉길의사의 비석하나, 중국인들에게야 남의 이야기에 불과하겠지만

우리에게는 중요한 역사의 현장이 아니던가.

같이 동행하신 교수한분이 어릴적 여기에서 살았다고 하면서 그 당시 부르던 애국가를 불러보았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역사책에서만 공부했던 역사의 실제현장을 내 두발로 밟아보니 또 다른 느낌이 전해진다.

정부든 민간차원이든 좀더 신경 써서 새롭게 정비하고 유지해서 우리의 민족혼을 배우고 옛 선열들의 정신

헛되게 져버리는 일이 없어야 하는 마음에서 쉽게 발길이 돌아서질 않는다.


거리엔 자동차와 자전거 많은 사람들의 물결로 어지럽다.

차선의 구분이 따로 없고 횡단보도의 구분이 따로 없다.

주위상황을 살펴보고 그냥 가면 되는 것이다.

오히려 자동차가 자전거를 보호한다. 우리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

자전거의 행렬은 남녀 구분이 없다. 남녀의 성차별을 두지 않는 이곳에선 여성도 꼭 같이 일을 한다. 아니

여성들이 일을 하고 남성들이 집안일을 한다든가?.

짧은 치마를 입고도 자전거 페달을 밟는 광경은 뭇 남성들에게 시각적 감각을 발동시키지 않는다.

거리의 교통공안원은 근무시간이 파하면 파라솔을 뽑아 둘러메고 철수한다.

질적하게 비가 내리는 날엔 우리네 농촌에서 신는 고무장화를 신고 사이카를 탄 경찰은 순찰 중 인가 보다.

아직 경제가 어려워서인지 실리를 추구하는 건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재미있는 광경들이다.


정보를 얻지 못하고 떠난 이번 여행에선 처음부터 끝까지 벙어리 삼룡이가 되어 많은 궁금증을 그냥하고

돌아온 아쉬움이 자리한다.

광활한 국토만큼이나 인구 또한 엄청나다. 12억이 넘는 인구이다 보니 생산성이 향상하더라도 생활의

풍요가 어려워 인구 억제정책이 불가피한 현상에 처해 있다고 한다.

장애아를 제외하곤 한 자녀 출생만을 법으로 정하여 둘째아이인 경우는 법적 인정을 받지 못한다고 하니,

국민 아닌 국민의 수는 또 얼마나 될까.

또한, 교육의 정도가 열악하여 문맹인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며 결혼하기 위해 최근 젊은이들은 좋은직장,

인류학교를 지향하는 형상이 두드러진다고 한다.


물의도시 소주와 항주로 떠난다.

버스로 내달린 두 시간.  잘 뚫린 고속도로엔 교통량이 없어 거침없이 질주할 수 있었다.

끝없이 평지로만 형성된 이곳은 산이 그리웠다. 아마 이 나라 사전엔 등산이란 단어가 없을 꺼다.

고속도로를 질주하다 휴게소에 잠시 들렀다. 이곳이 가관이다.

우리의 60년대쯤의 시골 구멍가게 같은 휴게소엔 냉장고가 없어 더운 날 흔한 아이스크림 하나를 먹을 수

없었다.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이곳을 당대시인“두목”은 이렇게 노래한다.

아득한 꾀꼬리 울음 속에 푸른 잎 붉은 꽃이 어우러지면

강마을 산골짜기마다 주기가 나부끼네

남조시절엔 480개의 절이 있었다지만

수많은 누대만이 실비 속에 젖고 있네.

 

예로부터 “하늘엔 천당이 있고 지상엔 소주 항주가 있다”라는 말대로 산과 호수와 정원에 둘러쌓인 고도.

일찍이 마르코폴로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화려한 고장이라고 항주를 찬미했다.

동양의 베니스.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명승지 천혜의 고장 항주를 뒤로하고 대륙의 수도 북경을 향해 하늘

위를 비행한다.

 

1989년 민주화 요구를 갈망하던 수많은 사람들의 피해현장.

역사의 현장 한가운데서서 그때의 함성이 들리는 듯. 궁전 같은 천안문의 웅장한 건축물에서 피 흘렸던

지난 과거를 말해주듯 온통붉은색으로 자리하고 있다.

자금성. 고궁의 웅대함 역시 땅덩어리만큼의 위용을 자랑하고 용이 부조된 석각계단의 섬세함도 중국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

마치 우리의 경복궁을 상상하게 하는 흡사한 곳이다.


홍콩의 반환시기에 용케도 때맞춰 찾아간 천안문 광장 일대는 축제의 행사준비가 한창이었다.

대형시계가 반환시간을 카운트하고 야간 불꽃놀이와 함께 거리엔 화려하게 조명의 터널을 이뤄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향내음 비슷한 야릇한 정통의 중국냄새. 공산국가에서 아직도 온전히 보존해오는 불교가 뿌리 깊게 생활

속에 이어져 절이 많은 특징을 지닌 탓에 향내를 그렇게 풍기는 걸까,

 

이렇게 더운 날에도 냉 음료보다는 더운물의 우롱차를 즐겨 마시는 이곳,

기름으로 튀겨내고 볶아내는 음식문화에서인지 수박까지 튀겨내는 이곳에 냉장고를 수출해야겠다.

야간시내 구경 길에 10위안짜리 택시는 시트가 온전치 않아 화물 같은 느낌으로 승차해야 했다.

상가는 밤 9시만 되면 일제히 불을 끄고 영업을 중단하게 되어있어 거리는 일찍 어둠 속에서 움직이게 된다.

사유재산이 아닌 국가의 재산이라 애써서 판매량을 늘리려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제 여정의 일정도 끄트머리 쪽에 와 있다.

만리장성의 거대한 꿈뜰거림을 보며 공자의 고향 곡부(취푸)를 거쳐 칭따오에서 귀국길에 오르기 위한 길목

에서 옛 성인을 만날 수 있었다. 유학길을 떠났던 맹자는 어머니가 그리워 집에 돌아오니,

어머니는 짜던 베를 칼로 잘라버려 다시 돌아갔다고 하는 비문에서 나약하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아직은 개발이 점차 진행되는 과정이라 여러 분야의 환경조건이 미약하지만, 21세기 세계의 중심지로  도약

광활한 대지위의 중국.

이 거대한 나라야말로 많은 인구만큼이나 무한한 잠재력을 세계 속에 과시할 그날을 꿈꾸며 개방의 바람은

자꾸 불어오겠지.


        1987년 6. 24일~~7월 2일 귀국(9박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