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운 분들에게 드리는 말씀. 짧고도 긴 여정이었습니다.
# 짧고도 긴 여정 #
올해엔 비가 참 많이도 왔습니다.
비도 내리고 내 눈물도 흐르고, 나에게 올 여름은 물바다 눈물바다를 이뤘습니다.
약속 없는 상태에서 간절한 마음하나만 이 내 육신에 담고 병원문턱을 오가는 발걸음엔
눈물자국만을 남기게 했습니다.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 발생하면서 짧은기간의 긴 시련이 시작됐던 것입니다.
생과 사를 넘나드는 순간이야말로 머릿속은 온통 헝클어진 실타래의 끝부분을 찾아
헤매며 블랙홀로 빠져드는 혼미함이 지배합니다.
죽음이란 것이 우리 곁에 아주 가까이 늘 함께하는 것이라는 것을 새삼 생각하게 합니다.
개똥밭에 굴러도 저승보다 이승이 낫다 라는 말이 있듯이 삶과 죽음은 극과 극이며,
천국은 죽어서 가는 곳도 아니고 먼 곳에 있는 것도 아니며 살아 숨쉬는 현재 이순간이
천국임을 생각하게 합니다.
정안수 떠놓고 제발 살려만 달라고 하나님, 부처님, 옥황상제님, 조상님, 별별 신들을 다
불러 모으며 애걸복걸하는 내 손바닥은 닭똥냄새가 나도록 비벼대며 뜨거운 눈물을 흘려야만
하는 일도 예전에 없었던 일인지도 모릅니다.
깨어날 줄 모르는 상황을 지켜보다 밖에 나와 한쪽 귀퉁이에 쭈그리고 앉아서 쓰디쓴
담배연기를 깊이 들여 마시고 있을 때, 도대체 내가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건지 정신이
혼미해질 때가 많았던 날들이었습니다.
이럴 때마다 입을 맞추고 함께 호흡할 수 있는 담배연기가 좋은 친구를 자청하는 일도
많았답니다.
텅 빈 집안에서 아이들 밥 챙겨주고, 세탁기를 돌려서 빨래를 널고, 방청소를 하고, 피곤이
쌓여 그대로 쓰러져서 잠을 청하고, 맘이 답답하면 대문가에 기대앉아 깊은 연기를 마시며
돌아오는 마누라의 발자국소리를 들으려 귀를 기울이고 멍청한 동공을 멀리 바라봐도 그림
자하나 나타나지 않는 오늘 하루도 허무함으로 지내는 날들은 슬픔으로 남습니다.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면 머시기가 떨어진다는 어른들의 말을 참 잘 듣고 살아온 놈이기에
부엌일엔 잼뱅이가 된지 오래기에 무엇을 어떻게 해 먹어야하는지 알수가 없습니다.
참으로 애가 타고 목이 마르는 짧고도 긴 시간동안에 검은머리는 흰머리가 많이도 생겨난
기가 막히는 답답한 생활이었습니다.
든자리는 몰라도 난자리는 크다고 했듯이 아내의 빈 자리가 이렇게 크게 느꼈던 적도 없었
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늘 사람이나 물건들이 그 자리에 그렇게 있었기에 소중함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지 모를 일입니다.
눈에 스치는 수많은 사람들을 봅니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모두가 그렇게 부럽다 라는
느낌을 받은 적도 예전에 미처 몰랐습니다.
똑똑하던지 바보든지, 잘생겼던지 못생겼던지, 뚱뚱하든지 날씬하든지, 작던지 크던지,
잘났던지 못났던지, 이런 것들을 따진다는 건 사치스런 생각들이며 제 몸 하나 살아있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부러운 일인가를 알게 합니다.
참으로 고마운 일입니다.
우선, 사경을 헤매던 아내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주었기에 세상에 있는 복이란 복은 모두
굴러 들어온 것이고, 그동안 잠자리만 함께 하지 않았을 뿐 아이들 챙기는 일, 반찬을 공급해
주는 일이며 아내의 빈 자리를 대신 메워준 이웃분들이 있어서 살아가는 힘을 얻을 수 있
었습니다.
또한, 먼곳에서 가까운곳에서 위로의 멧세지를 전해주며 물심양면으로 힘을 실어준 친구들
이 있었기에 머리 숙여 고마움의 인사를 올립니다.
많은 사람들이 전해주는 그런 사랑은 나의 처진 어깨에 용기와 희망을 얹어주고, 실의에서
허우적대는 두 다리와 양팔에 힘을 주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제는 집에 돌아와 사랑을 전해준 많은 사람들에게 보답하는 길은 원래의 모습으로 찾아
가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일에 주력을 다할 것이지만, 수술후유증이 어떤 형태로 남을지는 아직도 미지수이기에
노심초사하는 마음으로 생활하고 있습니다.
죽을까봐 걱정스러워 흘리던 눈물이 이제는 반가움의 눈물로 변했습니다.
삶의 한 전환점에서 새로운 마음으로 방향을 바꿔보는 계기가 되었지만, 나약한게 사람이고,
간사한게 사람인지라 어떻게 변할지 모르겠으나 변화된 자신의 모습으로 살아보고자 노력해
야 하겠습니다.
“한 사람이 다가온다는 것은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것은 한사람의 인생이 오기 때문이다“
광화문 네거리의 교보빌딩 벽면에 큼지막하게 걸려있는 현수막의 글귀입니다.
이 벽면에는 해마다 계절마다 한번쯤 생각해볼만한 의미심장한 글귀들을 바꿔 달고 있는데,
발걸음을 멈추고 깊이 생각을 해봅니다.
오고가는 많은 한사람 한사람들마다 한평생 살아가는 일에 즐거움만이 있을 수 없을 것이고
슬프고 괴로움만이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수없이 반복되는 희노애락속에 삶의 역사를 만들어가고 그 역사를 간직한 한 몸둥이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은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즐거울 땐 생각지도 않던 일들이 괴로운 일을 당하면 이 세상 나혼자 모든 고통을 끌어안고
살고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돌아보면 나의 이 고통보다 더한 어려움을 겪는 사람
들이 무지하게 많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누구나 힘든 일은 있기 마련입니다.
삶이란 쉬울 것 같으면서도 참으로 복잡 다양하고 노심초사입니다. 늘 걱정 없는 날이 없고
부족함을 느끼지 않는 날이 없으며 어느 것 하나 결정하거나 결심하는 일도 쉽지 않습니다.
살아가는 일은 내일을 알 수 없어 늘 흔들리는 외줄타기 같기도 합니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의미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무엇인가를 위해 관련을 맺고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우리 어린시절 친구들이 자리하고 있어 이번 일을 겪으면서 내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행복은 재산이나 지위가 아닌 마음의 조화를 잘 이뤄가며 건강함을 밑천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더운 여름 잘 지내기를 바랍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