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자격 / 최복현
어떤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형, 나이가 들수록 권리는 줄어들고 짐은 늘어나는것 같아"
나이가 들수록 삶의 짐이 무거워짐을 느낀다. 특별한 자격이 없어도 아버지는 된다.
어렸을적에 아버지라는 부름은 하늘처럼 높아 보였다. 아버지에게 무엇인가만 요청하면
무엇이든 가능 할 것 같았다. 먹고 싶은것이 있으면 떼만쓰면 어떻게든 아버지는 구해 올 수 있고,
가지고 싶은것도 무엇이든 졸라대면 가져다 줄 수 있는 존재로 여겼다.
내가 어른이 되었을때, 아버지가 다시는 이 땅에서 만날 수 없는 곳으로 가셨을 때,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은 다 죽어도 우리 아버지는 죽지 않는것으로 알았는데
어느 날 아버지도 몹쓸 병으로 시름시름 앓더니 돌아 가셨다.
그리고 이제 내가 아버지가 되었다.
아무런 자격을 받은 적도없이 아버지가 되었다.
"나 아버지 맞아?" 자문해 보지만 참 어색하다. 하지만 나에게 아빠라고 부르는 아이들이 있는걸
보면 아버지가 맞다.
아버지라는 직업아닌 직업이 익숙해지면서 삶의 무게를 느낀다.
책임져야 할 존재들이 등에 업혀 있는 짐의 무게를 또한 느낀다.
자격이 있든 없든, 능력이 있든 없든 나는 아이들의 아버지이다. 아버지 노릇을 하려니 버겁다.
되고 싶어 된것은 아니어도 나는 아버지이다. 그리고 제대로 아버지가 되는 수업을 쌓아야 한다.
어느 누구도 아버지란 이름을 다독여 줄 사람도 없다. 그져 삶의 짐의 무게를 점점 진하게 느껴가면서
세월의 무게를 얹어가면서 아버지라는 고독한 직업을 짊어지고 가야하는 외로운 존재이다.
바쁜 사람들도 굳센 사람들도 바람과 같던 사람들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그래, 그렇게 나도 집에 돌아와 아버지가 되었다. 맞아, 밖에 나가서 생활할때 나는 아버지가 아니었어,
아버지라는 사실을 잊고 생활했으니까 집이 돌아오면서 드디어 아빠라는 부름과 함께 아버지로 자리하고 앉는거야.
어린것들을 위하여 난로에 불을 피우고 그네에 작은 못을 박는 아버지가 된다.저녁바람에 문을 닫고 낙엽을 줍는 아버지가 된다.
집에 돌아와 소박한 아버지의 위치로 돌아간다. 밖에 나가서 시달리며 잃어버렸던 아버지의 품위를 되찾는다.
아버지가 되려면 적당한 위선도 필요하고 어느정도의 허풍도 필요하다는것을 배워간다.
나는 아버지라는 이름을 가졌으니까 아버지로 서려는 위선, 아버지답게되려고 어깨를 으쓱하는 허풍쯤은 하늘에 계신 양반도
이해하시기는 할꺼야.
아이들도 아내도 그런것쯤은 눈치채고 적당히 눈 감아 주는지도 모르지. 그런 식으로 나는 아버지가 되는법을 배워 간다.
그렇게 아버지의 모습을 갖추어 간다.
세상이 시끄러우면 줄에 앉은 참새의 마음으로 아버지는 어린것들의 앞날을 생각한다.
어린것들은 아버지의 나라다. 아버지의 동포다.
그 어린것들,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못 할 것같은 무기력한 강아지들, 그들을 위해 나는 나의 자존심 따위는 생각지 않는다.
때로는 얼굴이 확끈거리도록 뺨을 맞는 일이 있어도 기꺼이 참아내야 한다.
아니 그보다 더한 수치, 더한 괴로움도 참아낼 수 있다. 그럼에도 넉넉히 웃을 수 있다.
아버지로서의 인내뒤에는 맑은 눈동자의 너희들이 웃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괴로워도, 아무리 수치스러워도 난 웃을 수 있다. 싱긋 웃으며 괜찮은 표정을 지을 수 있는것은
너희들의 고운 눈동자 속에 내 희망을 심고, 너희들의 맑은 꿈속에 내 모두를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아버지의 희망이요 꿈이며 비젼이다.
그것은 괜찮은 아버지가 되려는 사람들이나 적어도 그렇게 노력하는 아버지들만이 느낄 수 있는 기쁨이다.
오늘도 나는 세상에서 떠나서 아버지의 자리를 메우러 간다.
생활인으로서의 비루한 옷을 벗어두고 그럴듯한 아버지의 옷으로 갈아입고 집으로 간다.
아버지가 되러 간다. 마음놓고 웃을 수 있는 자리도아니고, 세월의 무게를 짊어지고, 가정이라는 십자가를 덧붙여 짊어지고
아버지가 되려한다.
요즘같은 때면 더 버겁긴하지만 여린 새싹들의 희망을 생성시키고, 고운 꿈을 맘껏 펼칠 맑은 눈동자들을 기쁘게 상상하며
나는 집으로 간다. 아버지가 간다.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보이지않는 눈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않으나 물이 절반이다.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이다. 아버지는 비록 영웅이 될 수도 있지만...
아버지로 산다는 것은 녹녹치 않다. 나이가 들어 갈수록 권리는 줄어들고, 짐만 무거워 진다.
아버지로 살면서 나이가 들어가는만큼 자식들 눈치를 보아야하는 아버지이다. 아버지는 안팎으로 도전을 받는다.
얼마나 돈을 벌어오느냐가 자녀들에게도 아내에게도 아버지로서의 가치를 인정받는다.
어떻게보면 아버지라는 직업은 돈을 벌어오는 기계로 가치로 부여주는 직업이다.
한편으로 거느린 식솔들을 제대로 먹여 살린다는 뿌듯한 기분을 느끼기는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게 평가받는 것같은 생각에 먹먹함으로 눈물짓기도 한다.
적어도 가족구성원들에게만은 인정을 받고싶은 생각에 얼마나 우리 아버지들은 외부의 수모를 참고 견디면서
자존심을 내팽개치는 설움을 참아내야하던가.
폭탄을 만드는 사람도 감옥을 지키던 사람도 술가게의 문을 닫는 사람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밖에서 어떻게 살아내든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는 가장 듬직한 기둥으로 받치고 선다.
누구보다도 자랑스럽고, 누구보다도 훌륭하고, 누구보다도 믿음직스러운 아버지이다.
그 이면에는 얼마나 많은 눈물과 고독과 설움이 쌓여 있던가.
그럼에도 결코 아버지는 고독하지 않다. 더 이상 외롭지 않다.
지금의 이 수고를 딛고 초롱초롱한 미래의 꿈들이 자라고 있으니까.
그져 외롭고 힘들다가도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그 한마디면
아버지로서의 고독과 외로움도 눈녹 듯 사그라든다.
아버지의 때는 항상 씻김을 받는다. 어린것들이 간직한 그 깨끗한 피로......
"아버지되기는 쉽지만 아버지답기는 어렵다" / 세링 그레스
"아버지 한 사람이 백명의 스승보다 낫다" / 허버트
ㅡ 최복현의 <간절한 한마디> 중 ㅡ